728x90
반응형

전날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지인의 건강 상태가 안 좋다는 소식을 들어서 기분이 밤새 좋지 않았다. 밤에 안전 문자가 왔다. 한라산에 눈이 많이 내리니 1100고지로 가는 길과 한라산을 지나는 몇몇 도로가 통제된다는 문자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언제 비가 내렸다는 듯이 날이 맑았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의 날씨가 너무 달랐다.

 

아침을 먹다 문득 1100고지의 눈 덮인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눈 덮인 한라산을 등반해서 보면 좋겠으나 아무 준비 없이 한라산은 갈 수 없으니 1100고지 휴게소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중문 단지를 출발해 우리는 1100고지를 향해 달렸다. 중문 단지에서 1100고지로 오르기 위해 우리는 한라산을 오르는 길을 따라 계속해서 올라갔다. 한라산 정상은 새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었다.

 

점점 높은 지대로 올라오니 날이 쌀쌀했고 길가에는 눈을 볼 수 있었다. 제주도에서 눈을 본다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제주도는 사시사철 따뜻한 곳이라는 생각이 있다 보니 제주도에서 눈을 보면 왠지 기분이 좋았다. 속도제한의 40이라는 글이 내 마음을 후벼 파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안내판은 이제 넌 40이네, 똑바로 살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40이라는 숫자가 마음속에 꼭 박혀 버렸다.

 
 

지대가 높아질수록 눈이 더욱더 많았다. 도로의 눈은 거의 다 녹았지만 나뭇가지 위의 눈은 아직 녹지 않아서 눈꽃을 볼 수 있었다.

 

1100고지에 가까워져 오니 하얀 세상을 만날 수 있었다. 역시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 일찍 왔으면 더 하얀 세상을 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게으름을 피우다 늦어 버린 것이 아쉬웠다. 정오가 넘으면 눈이 다 녹을 것 같아 보였다. 그래도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막차를 탈 수 있는 점이 좋았다.

 
 

제주에서의 특별한 추억을 쌓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해 1100고지 휴게소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주차장에는 차를 주차할 수 없어서 길가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서 가야 했다.

 

2021년 1월에도 이곳에 왔었다. 그때는 한창 눈이 심하게 내릴 때라 정신없이 눈을 맞으며 걸었던 기억이 났다. 진짜 이렇게 눈이 많이 내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눈이 많이 내려서 내가 눈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눈이 내린 뒤 오니 뭔가 깨끗한 느낌이 들었다.

 
 

하늘이 너무 파랗기에 눈은 더욱더 깨끗하게 보였다. 눈을 밟을 때마다 뽀도독 소리가 났다. 너무 기분 좋은 소리였다. 전날부터 쳐졌던 기분은 멋진 풍경을 보고 있으니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아직 사람의 흔적이 없는 곳을 찾아서 걸어 보았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에 먼저 발자국을 찍어 보았다.

 
 

지대가 높다 보니 나무 위의 눈들이 녹지 않고 꽃처럼 매달려 있었다.

 
 
 

예상치 못한 눈을 본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나 전부 동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구름은 한라산 정상을 넘지 못하고 남쪽 하늘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날이 너무 청명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깨끗한 공기가 폐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산 아래는 따뜻해서 좋고 이곳은 시원하고 맑은 느낌이 너무 좋았다.

 
 

밤새 얼마나 많은 눈이 내렸을까!

 
 
 

매번 멀리서 보아야만 하는 한라산이 아쉬웠다. 한 번쯤은 올라보고 싶은데 지금 내 몸으로 오르기는 무리인 것 같기에 멀리서 바라만 봤다. 우리는 1100고지 앞에 있는 습지 길을 따라 걸었다. 눈이 소복이 내려진 습지의 모습은 고요했다. 바람 소리만이 이곳의 정적을 깨는 것 같았다.

 

데크 길에는 눈이 쌓여서 미끄러웠다. 길이 좁기에 사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사진을 찍어야 했다.

 

눈보라를 맞으며 찍던 2021년 1월의 1100고지가 생각났다 눈보라가 심하게 불기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사진을 찍었었다. 제주도도 이렇게 춥구나라는 생각이 처음 들었었다. 오늘은 그때와는 달리 편안했다. 회화 작품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습지 위에 쌓인 눈이 살짝 눈보라를 일으키며 우리 앞을 지나갈 뿐이었다.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서 걷다 사진을 찍다 걷다 사진을 찍다를 반복했다. 길가에 늘어선 차들에 비해 관광객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길을 조금만 넓게 만들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인공 조형물을 만들려면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아무튼 이곳을 걸을 때마다 가끔은 사람에 떠밀려 다닐 수밖에 없는 이 길이 종종 아쉽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누군가 만들어 놓고 간 오리를 보았다. 제주 현지 사람이 만들고 간 것일까! 누군가 센스 있게 스노우 덕들을 난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갔다.

 
 
 

나무가 길을 둘러싸면서 눈꽃 터널을 만들었다. 어떻게 찍든 어디를 찍던 똥 손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주는 풍경이었다.

 
 
 

눈발이 날리지 않기에 걷기도 좋았다. 아침 시간에는 눈을 보러 온 부지런한 관광객들이 많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여행을 할 때 남들보다 한 템포 느리게 가면 조금 더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것 같다. 모두 다 부지런하게 구경할 때 남들의 시계보다 자신의 시계를 한 박자 느리게 가게 여행을 세우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단지 가끔 한 박자, 한 템포가 느리기에 중요한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센스만점인 귀여운 눈사람이 난간 모퉁이에 있었다. 눈으로 몸을 만들고 나뭇잎으로 눈을 만들었는데 눈이 심술궂게 느껴졌다. 그리고 화룡점정으로 머리에 나뭇가지까지 하나 꼽혀 있었다.

 
 
 

눈구경을 하다 보니 다시 1100고지 휴게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하얗게 눈이 내린 습지는 자연의 도화지가 되었다 그림자가 눈 위게 그림을 그리고 바람은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지나갔다. 회화의 평면적인 아름다움과 조소의 입체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의도함이 없는 자연스러움 때문에 더욱더 눈길이 갔다.

 

흰 캔버스 위에 흑백으로 그림자를 그러놓은 것만 같았다. 보고만 있었는데 마음이 편안했다. 머릿속에 있는 잡생각들이 서서히 지워져 나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하얀 눈 위에 우리의 그림자가 다정하게 서 있었다. 아빠와 나는 이렇게 둘만의 단체 사진을 찍었다.

 
 
 
 

길가의 차들은 많이 줄지 않았다. 오히려 더 늘어난 것 같았다. 아마 뒤늦게 소식을 듣고 이곳으로 온 관광객인 것 같았다. 우리는 1100고지에서 내려와 다시 중문 쪽으로 향했다.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길은 눈이 많이 녹아서 눈꽃을 볼 수가 없었다. 우리가 1100고지로 갈 때가 아마 눈꽃을 볼 수 있었던 마지막이었던 것 같았다.

 
 

한라산에서 내려오던 중 거린사슴 전망대에 잠시 차를 세웠다. 이곳에 서니 중문과 서귀포 지역을 한 번에 볼 수 있었다.

 
 

날이 조금 더 좋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전망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거린사슴 전망대를 출발해 전날 가려다 못 간 카멜리아 힐로 향했다. 오늘은 카멜리아 힐에서 동백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여행지로 향했다.

반응형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